4.3. 사건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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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 제주...
일명 제주 4.3.사건이 일어난지 60년 입니다.
자료가 방대하지만 역사속으로 들어가보는 여유를......
미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反警)활동을 전개했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들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해 두 가지 목적, 즉 하나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다른 하나는 당면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깨졌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월 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생겼고, 6월 18일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 당한 사건이 발생,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제주 사태는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 군경 토벌대는 정부 수립과정을 거치면서 느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잠시 뿐이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일어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 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 상황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 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이다.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
■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4·3사건 전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기는 4월 3일 소총 30정으로부터 시작해 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 4·3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4,028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다. 본 조사에서는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 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27,719명과 한국전쟁 이후 발생된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희생 3,000여 명도 감안된 숫자이나, 향후 더욱 정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78.1%(10,955명), 무장대 12.6%(1,764명), 공란 9%(1,266명) 등으로 나타났다. 가해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을 제외해서 토벌대와 무장대와의 비율로만 산출하면 86.1%와 13.9%로 대비된다. 이 통계는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이 사망했다는 미군 보고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5.8%·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3%·2,985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 제주도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은 180명 내외로 추정된다. 또 경찰 전사자는 14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4·3사건 당시 희생된 서청, 대청, 민보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고 있다. 보훈처에 등록된 4·3사건 관련 민간인 국가유공자는 모두 639명이다.
■ 서청 단원들은 ‘4·3’ 발발 이전에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도 서청에 의해 자행되었다.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
■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사건으로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다. 결국 이 강경 진압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 희생되었다.
■ 9연대에 이어 제주에 들어온 2연대도 공개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즉결처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주민 집단총살사건인 ‘북촌사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이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한 사건이다. 위원회에 신고된 자료에 의하면,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개소에 이른다.
■ 1948년 12월(871명)과 1949년 6월(1,659명) 등 모두 두 차례 2,53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는 ‘4·3사건 군법회의’는 다각적인 조사결과, 재판서·공판조서 등 소송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점, 재판이 없었거나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이 통보되는 등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 하루에 수백명 씩 심리 없이 처리하는 한편, 이틀만에 345명을 사형선고 했다고 하나 이런 사실이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점, 그 시신들이 암매장된 점 등 당시 제반 정황을 볼 때,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 1948년 11월 17일 선포돼 그 해 12월 31일 해제된 ‘4·3 계엄령’에 대해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법적 근거 없이 발효됐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측과 일제 계엄령이 계속 효력을 갖고 있기에 적법하다는 측의 다툼이 있다. 여기서는 계엄의 법적 근거 여부를 떠나서 제주도에서의 계엄령 집행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탈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계엄령 하에서 재판절차 없이 즉결처분이 빈번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군 지휘관들조차 계엄령을 잘 알지 못했는데, 심지어 계엄령 해제 후인 1949년 제주작전에 참여한 2연대 대대장이나 독립대대 대대장은 그때까지도 계엄령이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집단 인명피해 지휘체계를 볼 때, 중산간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두 연대장의 작전기간인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6개월 동안에 전체 희생의 80% 이상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며 강경작전을 지시한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밝혀졌다.
■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미군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계속 보유하였고, 제주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였다. 특히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켰던 9연대의 작전을 ‘성공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송요찬 연대장의 활동상을 대통령의 성명 등을 통해 널리 알리도록 한국정부에 요청한 기록도 있다.
■ 연좌제에 의한 피해도 극심하였다.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4·3사건 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4·3사건의 상흔들이 그 유족들에까지 대물림된 것이었다. 제주도민들과 유족들은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로 인하여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1981년 연좌제가 폐지되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유족들이 당하는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948년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에서, 제노사이드는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명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은 전시(戰時)에서도 민간인에 대해서 △고의적인 살인 △고문 등 비인간적 행위 △고의적인 괴롭힘이나 신체 상해 △군사적 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대량 파괴와 약탈 등을 금하도록 규정했다. 더 나아가 모든 재판상의 보장을 부여하는 재판에 의하지 않은 판결 및 형의 집행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1948년 제주섬에서는 이런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 특히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토벌대가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며 과오이다. 결론적으로 제주도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였다고 판단된다. 바로 이 점이 4·3사건의 진상규명을 50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 조사는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4·3사건의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없다. 경찰 등 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 거부, 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는 이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한다.
일명 제주 4.3.사건이 일어난지 60년 입니다.
자료가 방대하지만 역사속으로 들어가보는 여유를......
미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反警)활동을 전개했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들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해 두 가지 목적, 즉 하나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다른 하나는 당면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깨졌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월 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생겼고, 6월 18일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 당한 사건이 발생,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제주 사태는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 군경 토벌대는 정부 수립과정을 거치면서 느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잠시 뿐이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일어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 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 상황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 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이다.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
■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4·3사건 전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기는 4월 3일 소총 30정으로부터 시작해 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 4·3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4,028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다. 본 조사에서는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 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27,719명과 한국전쟁 이후 발생된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희생 3,000여 명도 감안된 숫자이나, 향후 더욱 정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78.1%(10,955명), 무장대 12.6%(1,764명), 공란 9%(1,266명) 등으로 나타났다. 가해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을 제외해서 토벌대와 무장대와의 비율로만 산출하면 86.1%와 13.9%로 대비된다. 이 통계는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이 사망했다는 미군 보고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5.8%·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3%·2,985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 제주도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은 180명 내외로 추정된다. 또 경찰 전사자는 14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4·3사건 당시 희생된 서청, 대청, 민보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고 있다. 보훈처에 등록된 4·3사건 관련 민간인 국가유공자는 모두 639명이다.
■ 서청 단원들은 ‘4·3’ 발발 이전에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도 서청에 의해 자행되었다.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
■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사건으로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다. 결국 이 강경 진압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 희생되었다.
■ 9연대에 이어 제주에 들어온 2연대도 공개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즉결처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주민 집단총살사건인 ‘북촌사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이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한 사건이다. 위원회에 신고된 자료에 의하면,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개소에 이른다.
■ 1948년 12월(871명)과 1949년 6월(1,659명) 등 모두 두 차례 2,53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는 ‘4·3사건 군법회의’는 다각적인 조사결과, 재판서·공판조서 등 소송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점, 재판이 없었거나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이 통보되는 등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 하루에 수백명 씩 심리 없이 처리하는 한편, 이틀만에 345명을 사형선고 했다고 하나 이런 사실이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점, 그 시신들이 암매장된 점 등 당시 제반 정황을 볼 때,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 1948년 11월 17일 선포돼 그 해 12월 31일 해제된 ‘4·3 계엄령’에 대해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법적 근거 없이 발효됐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측과 일제 계엄령이 계속 효력을 갖고 있기에 적법하다는 측의 다툼이 있다. 여기서는 계엄의 법적 근거 여부를 떠나서 제주도에서의 계엄령 집행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탈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계엄령 하에서 재판절차 없이 즉결처분이 빈번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군 지휘관들조차 계엄령을 잘 알지 못했는데, 심지어 계엄령 해제 후인 1949년 제주작전에 참여한 2연대 대대장이나 독립대대 대대장은 그때까지도 계엄령이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집단 인명피해 지휘체계를 볼 때, 중산간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두 연대장의 작전기간인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6개월 동안에 전체 희생의 80% 이상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며 강경작전을 지시한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밝혀졌다.
■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미군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계속 보유하였고, 제주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였다. 특히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켰던 9연대의 작전을 ‘성공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송요찬 연대장의 활동상을 대통령의 성명 등을 통해 널리 알리도록 한국정부에 요청한 기록도 있다.
■ 연좌제에 의한 피해도 극심하였다.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4·3사건 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4·3사건의 상흔들이 그 유족들에까지 대물림된 것이었다. 제주도민들과 유족들은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로 인하여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1981년 연좌제가 폐지되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유족들이 당하는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948년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에서, 제노사이드는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명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은 전시(戰時)에서도 민간인에 대해서 △고의적인 살인 △고문 등 비인간적 행위 △고의적인 괴롭힘이나 신체 상해 △군사적 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대량 파괴와 약탈 등을 금하도록 규정했다. 더 나아가 모든 재판상의 보장을 부여하는 재판에 의하지 않은 판결 및 형의 집행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1948년 제주섬에서는 이런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 특히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토벌대가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며 과오이다. 결론적으로 제주도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였다고 판단된다. 바로 이 점이 4·3사건의 진상규명을 50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 조사는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4·3사건의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없다. 경찰 등 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 거부, 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는 이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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