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진짜 정치적 후계자는 박근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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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황석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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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YS의 죽음, 그리고 더 먼저 죽은 한총련을 회상하며
“김영삼과 한 하늘아래 함께 살 수 없다!”
97년 내가 다니던 대학 학생회실에 붙어 있던 구호다.
96년 연대 범민족대회 후 전원 구속을 목표로 대회 후 원천봉쇄를 감행한 무지막지한 정부.
YS는 그렇게 감에 의지해 상대를 무지막지하게 제압해내는 뚝심의 정치인였다.
국민학생였던 어린 내겐 개인적으로 내겐 YS, DJ 는 이해할 수 없는 은어였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데 아빠와 친척 어른들의 술자리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던 그 단어는 반발심을 자극했다.
‘아니 텔레비전에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왜 저리 말을 하냐고?’
그 당시 방송에는 YS, DJ 가 나오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 때 그랬다.
김일성은 혹부리 영감 캐리커쳐로 사진이나 영상이 나오지 않아야 했고, 아예 양김씨는 이름도 언급돼선 안될 북한보다 더 한 반국가의 상징였다.
맨 처음 TV에서 YS를 본 건 1985년 212총선에서 약진한 신민당 대표 때였다.
백발 머리의 그는 단호하게 정부 여당에 맞서 싸울 것임을 보여주곤 했다.
어른들 술 자리에서나 듣던 전설의 부활였다.
87년 6월 항쟁을 겪었고, 정권교체 실패의 한 축으로 비난 받았던 그는 90년 3당합당의 주역으로 당시 학생운동에 절망감을 안기며 이후 강경대 열사의 죽음이후 분신정국에 단초가 됐다.
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양김이 모두 참석했지만 91년도 강경대 열사 죽음에 DJ만 참여했던 사실이 이를 상징하지 않을까. 같은 양태의 죽음에 달라진 한 김씨의 배신을.
95년 한총련의 광주학살책임자 처벌 집회를 이용해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키고 ‘역사바로세우기’를 진행한 YS는 이듬해인 96년 범민족대회를 빌미로 대대적인 한총련 탄압을 자행했다.
이적단체 규정.
한총련 대의원인 각 단과 학생회장들은 자동으로 구속 대상자였다.
어떻게 하면 학생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을지를 아는 저들은 전문가였다.
학생운동의 패퇴와 재생산 구조의 붕괴. 학부제 적용으로 ‘과’의 공동체를 무력화 시켰다.
(두레, 품앗이, 향악 으로 내려오던 고유의 미풍양속이 사라졌다)
아니 그것보다 더 무서운 폭탄은 IMF 였다.
소대-중대-대대-연대로 무리지어 활동하던 집단을
“각자 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 돌격 앞으로!”를 명함으로써 마음속 있던 조직에 대한 부채를 탕감해주셨다.
한총련은 유명무실화 된 조직이 되고 말았다.
현재 한국의 대통령은 더 큰 강적이다.
미국 유력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서울지국장이 마스크를 쓴 시위대를 'IS'에 비유한 박근혜 대통령 발언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알라스테어 게일(Alastair Gale) <WSJ> 서울지국장은 11월 24일 트위터에
“South Korea's president compares local protestors in masks to ISIS. Really"
라는 영문 글을 올렸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한국 대통령이 마스크를 쓴 자국 시위대를 IS에 비교했다. 정말이다”가 된다.
YS가 한총련을 깨트렸듯이 박근혜는 민주노총을 겨누며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한총련은 학생들이 만든 대중단체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헌법 상 권리인 노동3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노동조합들의 총 연맹이다.
상식적으로는 깨트리고 해체하고 없애서는 안되는 조직이다.
박근혜는 2013년 12월 경찰력을 앞세워 수배자를 검거하겠다고 민주노총을 침탈했고, 2015년 11월에는 집회에 폭력이 있었다는 점을 앞세워 민주노총 및 가맹단체들에 압수수색을 감행했다.
국민들의 정치 혐오와 또 한편의 일방적인 묻지마 식 지지는 YS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집권 3년차 동안 성과가 없는 박근혜가 정말 하고픈 일은 어쩌면 민주노총 해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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