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불타는 얼음’ 서평 - 그는 북한 서열 상위 랭커 ‘김철수’ 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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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황석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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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불타는 얼음’ 서평 - 그는 북한 서열 상위 랭커 ‘김철수’ 였나?
http://www.yes24.com/24/goods/37955110?scode=032&OzSrank=1
송두율 교수의 ‘불타는 얼음’을 봤다.
전자책으로 나와 있으면 결재 후 다운 받아 바로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전차책으론 출간하지 않았다.
도봉구립도서관 통합홈페이지 검색하여 도봉정보도서관에 5월 2일 반납됐음을 확인한 후, 3일 쉬고 4일 아침에 가서 빌렸다.
분류 번호로 못 찾고 도서관 사서에게 부탁했더니 신간쪽에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찾았다.
사서 왈 “안도의 한숨을 쉬시네요.”
1만 8천원짜리 책에 무슨 깊은 의미부여일지 몰라도 암튼, 이번 연휴 기간 동안 꼭 읽어 나름 보람과 의미를 찾고 싶었다.
송두율 교수가 한국 감옥에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생활을 했던 시기는 2003년에서 2004년였다.
텍스트 파일로 송두율 교수의 저서를 갖고 있었는데, 2003년 국가보안법 파동 이후의 그의 입장, 변명을 듣고 싶었었다.
몰랐는데, 2007년 ‘미완의 귀향과 그이후’ (후마니타스) 라는 책을 이미 쓴 바 있었다.
http://www.yes24.com/24/goods/2532640?scode=032&OzSrank=2
목차를 살펴 봤는데, 2003년 사태에 대한 언급과 내용이 신간 ‘불타는 얼음’ 과 비교할 수 없었다.
결국, 하룻만에 전부 다 읽게 됐다. 처음엔 북한에 대한 송두율 교수의 시각부터 시작해서, 한국 국정원, 검찰, 구치소 체험기. 그리고 이후 생각과 근황들. 마지막으로 출생에서 한국을 떠나기 까지.
내가 궁금했던 것부터 차례대로 읽은 바를 정리하자면,
1. 북한 노동당 서열 상위 ‘김철수’는 사실이 아니다.
송교수를 ‘김철수’라고 주장했던 근거에는 이를 증언한 3명의 증인이 결정적였다.
(1) 자칭 주체사상 창시자 황장엽
송교수가 ‘김철수’라고 주장을 한 건 죽기 전 황장엽의 증언이 시작이다. 송교수는 독일에서 황씨에게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고, 국내에서 수사기관이 이를 두고 거짓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난 황씨가 아름다운 노년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성하긴 해서 국내에서도 아들을 만들었다고는 들은 바 있다.)
(2) 월북 과 탈북 후 국정원 산하 연구기관에 종사한 오길남
또한, 오길남이라는 독일 거주 한인 가족의 북한 망명과 1년만의 개인 탈북과정에서 송교수와 독일 거주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씨의 월북 권유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선 오씨의 저서에서도 월북을 권유하고 도와줬던 건 중년의 환전상 여인이었다는 것과 오히려, 오씨의 탈북 후 가족들을 북에서 나올 수 있도록 윤이상과 도왔다는 주장였다.
(책에서 오씨가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라고 들리도록 혼잣말을 했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오래 산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냉탕과 온탕을 오가서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3) 국정원 공작원 유학생
독일 주재 북한대사관으로부터 쓰지 않는 낡은 컴퓨터를 받아 지웠던 예전 파일들을 복구한 국정원 공작원. 이로 인해 북한대사관 직원은 의도치 않게 ‘공화국’의 비밀정보를 누설, 공유한 죄를 감당하지 못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검찰 조사과정에서 옆 방에서 대질 심문을 할 것이라고 협박했으나 결국 한 차례도 만나지 못했다 한다.
(나도 학생 때 공용컴퓨터로 야한 것 봤다가 ‘쿠키’를 지우지 못해 선배에게 양해 구하고 덤터기를 씌운 적 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형님”)
이렇게 3명의 주장으로 송교수가 ‘김철수’라는 죄명을 뒤집어 썼지만 2심 재판에서 독일인 변호사가 북한 대사관을 통해 외국인이 당 서열에 올라있지 않다는 공식회신이 재판정에 공식 제출됐다고 한다.
송 교수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수차례 대화를 나눴지만, 본인 희망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면하지는 못했으며 김정은 정권 이후에는 오히려 북에 방문도 하지 못하는 소원한 관계가 됐다고 한다.
송 교수는 90년대에 남, 북, 해외 학자들의 민간 연구 모임을 주도했으며, 이같은 노력이 2000년 6.15 공동선언의 바탕이 됐음을 자랑스러워했다. 또한, 2003년 재판과정에서 남측 학자의 재판 증언으로 “검찰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남측 학자들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인가?” 라고 반문해 재판정 분위기를 환기 시킨 사실을 증언했다.
2. 그렇담, ‘송두율 교수 사태는 왜 일어났는가?’ 이다.
(1) 송 교수를 지켜줘야 할 노무현 정부 탄핵기간과 맞물린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 당했다. 그리고 총선 후 헌법재판소 판결에 의해 대통령직에 복귀 했다.
소위, 2003년 송두율 사태는 공안정국 조성을 노리는 공안기관 국정원과 검찰의 반격였던 셈이다.
(2) 노무현 대통령 탄핵 취하 후 집행유예로 독일에 다시 갈 수 있었다.
1심은 검찰 구형 징역 15년, 법원 판결 징역 7년였다.
2심은 법원 판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판결였다.
공안정국을 조성한 세력의 의도는 ‘용두사미’. 결국 송 교수는 조국(?) 독일에 돌아갔다.
(3) 송 교수를 원망한 남측 시민단체, 그리고 최소한 ‘침묵’의 비겁함
송 교수의 책에 의하면 남북해외 학자들 모임에서 송두율 교수를 시기(?)한 많은 교수들이 있었다 한다. 참고로 음악가 윤이상 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홧병도 남, 북, 해외 범민련의 명망가들 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문익환 목사를 존경하는 데, 범민련 조직에서 ‘개인적 허명심에 조직분열을 획책한’ 문익환으로 평가 받는 점을 보면 운동조직 특유의 조직우선 논리, 개인에 대한 견제 등이 분명히 있음을 느낀다.
송두율 교수를 초청한 남측 시민단체, 교수들에 대한 고마움과 섭섭함도 나열돼 있는데, 서울대 교수들 중 김세균 교수는 끝까지 변호해 주는 노력을 했던 반면 한상진 교수는 등을 돌린 것으로 나와 있다.
(잠시 ‘한상진’을 검색해 보니 ‘이승만 국부’ 파동이 검색된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노년의 길로 가는구나)
“왜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 노무현 정부를 곤란하게 하셨나요?”
이런 질문들이 그를 무척 힘들고 당황스럽게 했다.
통합진보당 해산 과정에서 국회체포동의안에 찬성한 민주당과 정의당은 통합진보당 당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언제까지 스스로 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사회적 고백을 해야 하는가?
맹목적으로 박정희 - 김일성, 다시 박정희로 아버지를 바꿔가며 충성 맹세를 하는 뉴라이트 또라이 짓을 봐야 하는가?
이 보다는 낫다는 전제하에 민주당에 투항한 운동 선배들을 옹호해 줘야 하는가?
양비론은 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진짜 용기는 양쪽 중 한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비판적지지’ 나 ‘독자후보론’ 중 택1의 과정이 운동이 아니다.
때에 따라 전술을 적용할 수 있는 전략적 판단 하에서 긴 호흡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한 활동일 것이다.
기호 1번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 된 상태에서 양쪽 날개, 양쪽 다리의 한 축인 진보정당에 투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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