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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외교를 너무 잘해서 망했다?
나라와 자신을 망친 '고종'의 외교전략
    김종성(qqqkim2000) 기자   
 
 1910년 국권상실의 원인에 대한 일반적인 진단은 조선이 국제정세에 어둡고 외교를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구한말의 우리 조상들은 무능했다”고 말할 때에 그 ‘무능’은 주로 외교력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이러한 인식은 지나치게 모든 것을 외교로 풀려는 경향으로 연결되고 있다. 통일도 되기 전에 ‘통일 후에 누구와 동맹할 것인가?’라는 관심이 벌써부터 존재하는 것도 그 점을 보여 준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외교지상주의'에 대한 맹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세기말의 조선이 과연 외교를 못했는가?’라는 문제는 한번쯤 정밀하게 점검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구한말의 역사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외교적 수완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개항 이후 고종의 대외정책을 살펴보기로 한다.

1815년 비인회의(Congress of Wien) 이후 19세기 세계 외교를 풍미한 조류는 ‘세력균형’이었다. 영국-러시아를 양대 축으로 하는 구도였다.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의 동아시아에서도 영-러의 세력균형 하에 일본·프랑스·독일·미국 등이 세력증강을 도모하는 형세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및 세계 외교의 흐름을 조선의 대외정책에 ‘수입’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고종이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연구 활동에 의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아직도 고종을 무능한 군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고종이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기 주장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고 인식하는 경향도 여전히 강한 듯하다.

하지만, 선악의 가치판단을 일단 떠나 고종이라는 인물이 상당히 명석한 인물이었다는 점 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뒷부분에서 언급하겠지만, 그는 세계 외교의 조류에 상당히 밝은 사람이었고, 또 그것을 조선의 대외관계에 응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조만간 다른 기사에서 다루겠지만, 명성황후가 고종을 조종한 게 아니라 도리어 고종이 명성황후를 조종했음을 추론케 하는 정황 증거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고종은 자신의 명석함을 숨기고 다른 인물들을 앞세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퍼스낼리티(성격)의 형성은 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지혜롭게 살아야 했던 소년시절의 경험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원군의 그늘에서 자란 고종의 외교정책

고종이 실제로는 명석하고 또 대담하기까지 했다는 점은 개항 이후 세계열강을 조선에 끌어들인 것이 그의 수완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등의 사례처럼 19세기말의 조선은 외세의 침탈을 군사적으로 막아낼 만한 역량이 있는 나라였다. 강화도조약(1876년) 이후에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당시의 주변 열강은 '어떻게 조선을 침탈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도 '어떻게 조선에 진입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할 처지였다. 그만큼 열강의 조선 진출은 난공불락의 성벽과 같았다.

그런데 이런 조선에 1882년 이후로 청·러·미·영 등의 열강이 ‘마구잡이’로 들어와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대만쪽 역사서인 <청계 중·일·한 관계사료>에 소개된 광서 5년(1879) 7월 4일자 청 광서제의 유지(諭旨)에 따르면, 당시 청나라는 어떻게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어떻게 서양열강을 조선에 끌어들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조선에 먼저 진출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의지대로 자국이 조선에 진출하고 또 서양열강을 조선에 끌어들이는 줄 알고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청나라가 고종에게 이용을 당한 것이었다. 1880년 전후의 고종은 노장파들로부터 왕권을 지켜 내기 위하여 36세의 젊은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보내는 등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고종의 외세 끌어들이기는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도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학보> 32집(1966년)에 실린 김종원의 ‘조·중 상민수륙무역장정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따르면, 임오군란 이전부터 조선에서는 자체적으로 서양열강을 끌어들여 세력균형을 도모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또 중국 측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조선책략>이 조선 고종으로 하여금 서양에 문호를 열도록 만들었다고 자부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종이 <조선책략>을 이용한 것이었다. 고종은 그 논문을 받은 1880년 10월 2일로부터 불과 9일 뒤인 10월 11일에 친청(親淸)·결일(結日)·연미(連美) 정책을 조회에서 윤허하였다.

논문 1편이 불과 며칠 새에 고종의 생각을 싹 바꿔놓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책략>을 받자마자 고종이 “주일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도 과인과 국제인식이 같다”며 좋아했다는 점은 고종이 이미 그 전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책략>이 고종의 마음을 움직인 게 아니라, 고종이 정책 변화의 명분을 얻기 위해 <조선책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이 선택한 대외전략은 ‘이이제이’
 
고종의 새로운 대외전략은 서세동점의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열강 끌어들이기’와 ‘세력균형’을 시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세력균형은 ‘나와 남의 세력균형’이 아니라 ‘남과 남의 세력균형’이었다. 아버지 대원군의 ‘결사항전’ 노선과는 정반대로, 그는 ‘이이제이’로 위기를 돌파하려 하였던 것이다.

1880년 이후 고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강을 끌어들였다. 1882년 5월 22일에는 청나라의 도움을 빌려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을 끌어들였다. 또 임오군란 발생 직후에는 청나라에 체류하고 있던 김윤식·어윤중에게 “청나라의 군사 개입을 부탁하라”는 비공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미국에 이어 청나라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청나라는 이미 그 전에 조선에 진출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위의 광서 5년 유지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그 이전만 해도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외교에 간섭하는 것은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청나라는 조선과 교류는 하고 있었지만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는 사상 처음으로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다.

자신이 끌어들인 청나라가 힘이 너무 세 지자, 고종은 이번에는 미국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은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에 별 관심이 없었고 또 능력도 없었다. 미국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김옥균·박영효·민영익·김관선 등을 러시아 측에 여러 차례 보내 수교 의사를 타진한 끝에, 1884년 7월 7일 조·러 수호통상조약 체결로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조·러 조약은 대단한 외교적 사건이었다. 영·청·일 등이 러시아의 남진을 집중 마크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작은 나라 조선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도 대단했고, 또 주변의 견제를 뚫고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한 것도 대단했다. 고종의 외교적 수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외세를 끌어들여 외세를 견제한다는 고종의 외교 노선은 결국 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가 끌어들인 외세 중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1894년에 ‘자기들끼리의 대결’을 조선 무대에서 치렀고(청일전쟁), 조선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러시아·미국 등은 청일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일찌감치 발을 빼고 말았다.

일본군 끌어들여 동학농민군 진압한 고종

고종의 외교 노선은 청일전쟁을 끝으로 마감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고종은 청일전쟁을 겪고도 자신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자, 이번에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정권 유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여 자기 백성들을 죽인 것이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힘이 너무 세 지자 이번에는 아관파천(1896년)을 통해 러시아의 세력을 다시 끌어들였다. 일본 연합함대가 청나라 북양함대를 침몰시켜 일본이 기세등등해 있던 그 상황 속에서도 고종은 일본을 따돌리고 러시아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 방법은 제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1896년 5월부터 1898년 4월까지 조선에서 러·일 세력균형이 형성되어, 어느 한 나라도 조선에 대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고종이 1880년부터 학수고대하던 세력균형이 16년 만에 드디어 성취된 것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외교적 성과에 기인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대외정책은 기본적으로 사상누각(砂上樓閣)이었다. 그 구도는 조선의 자유의지대로 유지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는 구도였다.

여순·대련 점령(1898년 3월) 이후 국제적 고립에 빠진 러시아는 대(對)러시아 연대에서 일본을 빼내오기 위해 1898년 4월 ‘만주는 러시아, 조선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협정을 체결하고는 한반도 무대에서 발을 뺐다. 이로 인해 러·일 세력균형은 파괴되고 조선은 일본의 단독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종이 2차례나 끌어들인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으로 동아시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1882년 이후 고종이 끌어들인 외세들은 하나같이 일본에 의해 밀려나거나(청·러) 혹은 스스로 물러가고 말았다(미국·독일).

자신도, 가문도, 나라도 망친 고종의 외교수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은 외교를 못해서 망한 게 아니라 외교를 너무 잘해서 망한 것이다. 외세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이고 자체적인 역량증대에 투입할 자원을 외세 끌어들이기에 ‘탕진’했던 것이다. 고종 친정(親政) 이전에만 해도 조선은 서양열강이 ‘어려워하던’ 나라였지만, 이이제이 전략 채택 후에 조선은 주권을 지키기에도 버거운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고종은 분명 국제정세에 어두운 지도자도 아니었고, 외교적 수완이 없는 인물도 아니었다. 국제적 견제를 뚫고 조·러 조약을 체결한 것이나, 청일전쟁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러·일 세력균형을 일구어낸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세계정세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 외교적 수완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내적 역량인 동학농민군을 궤멸시킨 것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조선의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타국의 역량을 이용하기를 더 좋아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왕위를 얻은 소년시절의 경험이 그런 퍼스낼리티를 형성하는 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그 때문에 자신도 망치고, 가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고 말았다.

국가가 외교를 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동맹의 대상을 잘 선택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자국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 스스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일단 나를 생각한 연후에 '나와 남의 관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것에 대해 새롭운 관점으로 바라볼수 있게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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